온몸이 두들겨맞은듯 아파서 앓다가 잤다. 꿈에 나는 열살쯤 된 어린애였고, 머슴 돌새는 나보다 예닐곱살이 많았다. 돌새는 자상하고 다정한 일꾼이었고, 나도 돌새를 따랐다. 집에는 연로하신 할머니 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디 간 건지 모르겠다.


   내가 열 다섯 살 쯤 되었을 때는 치매가 우리 할머니에게 귀신 보는 능력을 주었다. 고용관계는 만료된지 오래였지만, 돌새는 계속 우리 식구였다. 돌새는 늘 나를 ‘아기씨‘, ‘아씨‘라고 부르며 깍듯이 존대말을 썼다. 어릴 땐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 혹시 돌새가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껄끄럽게 여길까봐 겁이 났다. 아직 산중턱까지밖에 못 내려왔는데 땅거미가 지는 것 마냥 겁이 났다. 나는 돌새와 말섞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스물이 넘은 돌새는 동네에서 힘이 제일 가는 장정이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나이를 먹는데 세상은 빠르게 흘러갔다. 도시화는 우리 고을을 “변두리“로 만들었다. 나는 내가 “빈민“으로 분류되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 어른들은 박탈감을 잊기 위해서인지 곱씹기 위해서인지 술을 마셨다. 도시에서 온 녹색 병이 구멍가게에 늘 한가득이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사원이 무슨무슨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고 한다. 곧 사원은 깔끔한 건물로 개축되었다. 이끼낀 석탑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놀이같은 건 이제 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여하튼 놀이터가 저렇게 번쩍번쩍 해지니 기분은 구깃구깃했다. 이제 우리 중에서는 아무도 거기서 놀지 못할테니까.


  돌새는 그 곳의 경비가 되었다. 제복을 입은 돌새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소주병 숫자만큼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돌새가 출세했을테니 우리를 업신여길거라며 열심히 돌새를 흉보았다.

  ‘머슴이었던 주제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뚜렷한 주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가만히 있었다. 나는 말하는 것이 서툴었고,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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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새는 낮에는 사원을 순찰하고, 날이 저물 때 즈음 집에 들어왔다. 그 날도 할머니는 방에서 자꾸 귀신을 물리치고 계셨다.


  “할머니, 이제 귀신 나갔어?“

  “아니 보면 모르냐, 여기 딱 버티고 안 나가고 있잖여, 어서 꺼져!! 가!!!!“


  할머니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고 나는 방문을 열어 붙들고 있었다. 그 소란 중에, 칼칼한 할머니 목소리와 너무 다른 돌새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예요?“

  “아, 돌새, 왔어? 할머니가 자꾸 귀신이 방에서 나가지를 않는다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말 끝에 무슨 어미를 붙여야할지 모르겠으니, 한 마디도 제대로 할수가 없다. 말이 대체 뭐길래, 아무 것도 담을 수가 없누... 나눌 수 있는 것들이 희박해진다. 할머니는 계속 악을 쓰고 계셨다. 답답했다. 


  돌새는 잠시 생각하더니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귀신이 왜 안 나가느냐고 물었다. 횡설수설하는 할머니 얘기를 끝까지 듣더니, 돌새는 우리를 안심시켰다. 


  “귀신이 몸이 작으니까, 큰 문으로 나가기가 싫은가봐요. 들어올 때는 저 창문으로 들어왔으니까, 나갈 데를 만들면 될거예요. 이 창문을 좀 뜯을게요.“


  돌새는 자기 방에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공구를 챙겨오더니 뚝딱뚝딱 창문을 손보았다. 낡은 창틀에는 내가 비상금으로 모아둔 동전과 지폐들이 잔뜩 있었다. 창피했다. 돌새는 빙그레 웃으면서 돈들을 한 데 모아 옆으로 치워두고 일을 계속했다. 작은 창이 완성되었고, 할머니는 편하게 자리에 앉으실 수 있게 되었다. 돌새와 나는 산책을 나갔다.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주위에 인적이 없었다. 돌새는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우리가 살았고 살고 있는 집 또한 보이지 않았다. 조금 걷다가 내가 우물거리며 바보같이 말을 걸었다.


  “돌새, 애들이 궁금해하던데... 이제 막 반말쓸거냐고...“

  돌새는 담담하게 답했다.

  “안 그럴거예요, 아기씨.“

  아기씨라는 말이 너무 불편하고 피하고 싶었다.

  “옛날처럼 계속 그러는 거... 기분 나쁠 것 같은데...“


  돌새가 말을 받기 전까지 짧은 침묵 동안 내 마음의 설움들이 확 엉켜버렸다. 시대에 뒤쳐진 빈민이 되고, 과거의 악습이 되고, 몰락하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내겐 무언가를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친구들과 추억을 채우던 사원이 소중하다고, 예전엔 잔인했고 지금은 흉흉해진 마을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마실을 나가주던 돌새가 소중하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구체제의 악습이므로. 돌새는 이런 나로부터 떠나야했고, 나는 뒤에 남겨져야했다. 나는 돌새를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그래야만 했다.


  돌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과거의 내 행복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시대의 책임을 내 인생으로 져야했다. 나는 잊혀지고 사라진다. 내 앞에 놓인 소리없는 삶은 얼만큼이나 길까...


  눈물이 자꾸 맺혀서 다른 쪽을 보며 걸었다. 돌새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씨는 지금 이대로 괜찮아요.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고여있던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눈물이 번져가는 내 얼굴을 돌새가 품에 묻어주었다. 돌새도 정말 많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돌새는 나와 함께 웃고 놀던 날들을 증오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버릇없고 고약한 계집아이로 기억될 준비를 하며 의연하려 했지. 그런데 돌새는 내가 꽃목걸이를 만들어주던 것을 기억하고 있나보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주고, 시원한 물을 떠다주고, 매일같이 돌새 돌새 돌새, 너를 너무나 좋아하던 나를... 돌새가 나를 안아주었다. 소리내서 울지 않으려고 숨을 참자 어깨가 구부러졌다.


  돌새, 아예 세상이 딱 두 쪽으로 나뉘어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선한 쪽과 악한 쪽으로. 그러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우리가 서로를 미워할 수 있으면 얼마나 간단할까... 사랑이 없으면, 미래가 없는 대신 정말 얼마나 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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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3. 26.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