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차갑고 어두운 냉장고 속, 태평양을 건너온 레몬들은 그 곳에 갇혀있었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어두운 박스에 실려 계속 굴러다니던 레몬들이었다. 살벌해질대로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저 냉장고 문이 열릴 때마다 끌려나가는 레몬들이 돌아오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나가면 더 나은 곳으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연찮게 생환에 성공한 레몬 하나가 섬뜩한 소식을 전하고서는 하루 뒤 다시 끌려나갔다.
[일단 밖에 나가면 배를 반으로 갈리고, 칼로 속살을 갈기갈기 찢긴다.
그 후에는 커다란 숟가락을 집어넣어 즙과 속살을 짜낸다.
그것이 우리를 기다리는 정해진 운명이다.]
레몬들은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냉장고 문이 한번 열릴 떄마다 껍질에 잔뜩 묻힌 왁스를 찔끔찔끔 짜내면서 두려워했다. 운명은 바뀔 수 없다. 자신들에겐 도망칠 발도, 거부할 수 있는 손도 없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앞두고 있는 레몬들은 점점 무기력해졌다. 동료들은 하나씩 하나씩 끌려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서른 남짓 되었던 레몬들은 이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두려움을 못이겨 차라리 덜 아픈 죽음을 선택하겠다며 곰팡이에게 몸을 내어준 레몬도 있었고 냉장고에 전해져오는 진동을 빌려 온몸을 벽에 부딪히며 자해하는 레몬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 한 레몬이 실성한 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고통 속에서 죽을 거라면 나는 내 속살을 내어주고 그 놈의 속살도 보고 말테다]
레몬들은 그의 자조적이고 음산한 다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정신을 반쯤 놓은 듯한 그 레몬이 잡혀 나갔다. 다시 어두워진 냉장고 안은 실소도, 비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레몬들은 생기를 잃어갈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변화가 발생했다. 그 미친 레몬이 끌려나간 뒤, 더 이상 커다란 손이 남은 레몬들을 끌고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고문과 죽음을 맞닥뜨리는 것은 오늘이건, 내일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지망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었던 레몬들의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끌려나간 미친 레몬의 중얼거림이 되풀이 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그가 무언가 했다는 직감, 그것을 깨달은 것은 형의 집행이 중지된 지 삼일만이었다.
무엇인가 변했다...!
레몬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크게 일었다. 밖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외출을 자주하는 높은 곳에 있는 반찬통에게 레몬들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마지막으로 나간 레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넓고 둥그런 반찬통은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 녀석, 인간을 칼로 찔렀어.]
반찬통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여느 때처럼 인간이 배를 가르고 먼저 나가있던 첫번째 레몬의 속살을 헤집었지. 씨는 씹어먹고 즙은 핥아먹었어. 레몬을 다 짜내 종잇장처럼 구기더니 껍데기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렸지. 아마 너희가 말하는 마지막으로 나간 레몬은 두번째 희생자였던 것 같아.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 자의 배를 가르고 칼로 헤집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 레몬,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쉽게 속살을 내어주지 않았어. 끈질기게 칼에 베이지 않으려고 버틴 모양이야. 인간이 투덜대면서 힘을 엄청 쓰더라고. 그 순간이었지.
그 녀석, 자신의 가장 두꺼운 꼬리 부분을 파고든 칼날을 느끼고서야 온몸의 힘을 빼더군. 어떻게 됐느냐구? 당연히 그 칼날이 엄청난 속도로 레몬의 가장 두꺼운 부분의 껍질을 뚫고 나갔지. 그리고 그 칼이 인간의 손을 찔렀어. 으음..찔렀다기보다는 베었다는 표현이 맞을까. 나는 그걸 보고 온몸에 한기가 돋아 물방울이 맺혔다니까. 그녀석, 자기 몸을 희생하고서는 그 잔인한 인간의 손을 베어버린거야.
인간은 처음엔 멍하니 손을 보고있더니 레몬을 꿰뚫은 칼을 내던지고 손을 부여잡더군. 식탁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나까지 그 끔찍한 광경을 다 보고 말았어. 갈라진 살 사이로 하얀 속살이 보이는가 싶더니 시뻘건 피가 콸콸콸...으유.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군 그래. 꽉 다물은 입새로 끙끙거리며 욕설이 비집어 나오더란 말이지. 피가 멈추니 주섬주섬 집을 나가더라고. 아마 병원이든 어디든 간거였겠지. 아주 보기 무서웠어. 우리들 중에 하나라도 성질에 못이겨 집어던지는게 아닌가 싶었다니까. 아무튼 간에 말이지....."
반찬통의 무용담 아닌 무용담은 그 후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레몬들은 냉장고 가장 깊은 곳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희생당한 레몬은 다짐처럼 인간의 속살을 헤집어놓고야 말았고 마침내 레몬들의 복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비록 그것은 딱히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지만 갇혀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레몬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형이 중단된 이후 열흘도 지나지 않아 레몬들은 다시 냉장고 안에서 조용히 차례에 따라 끌려나갔다. 그렇지만 예전의 무기력함과 공포감은 더 이상 어두운 신선실을 뒤덮고 있지 않았다. 레몬들은 나름대로의 다짐을 하며 끌려나갔지만 여전히 생환자는 없었다. 때때로 반찬통이 그 인간의 손가락이 그 사건으로 불구가 됐다는 둥하는 소식을 전해올 뿐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끌려나온 레몬은 조용히 칼날을 마주했다. 잔인한 인간은 다시금 레몬의 배를 가르고 속살을 헤집기 시작했다. 레몬은 껍질 뒤로 조심스레 자신을 쥐고 있는 네 개 뿐인 인간의 손가락을 느끼면서 조용히 정신을 잃었다.
[으으, 이놈의 레몬즙 짜는게 왜 이렇게 무섭냐.
이제 레몬이 아무리 좋아도 그만 쳐먹어야지 진짜..안되겠어.크크크]
인간은 웃으면서 마지막 레몬의 속살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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